문어 피가 파란색이라고?
그냥 인터넷에 떠도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 파랗다. 문어를 잘라보면 정말로 파란색에 가까운 혈액이 흐른다. 먹기만 했지 이런 생각은 상상도 못 해봤다. 문어 피가 파란 이유는 단순히 “색깔 차이”가 아니다. 생존 전략 수준의 치밀한 생물학적 설계라는 점이다.
피는 무조건 빨간색?

우리는 피가 빨간색이라고 배웠다.
당장 손을 조금 다쳐도 새빨간 피가 흐른다.
학교에서는 헤모글로빈(Hemoglobin, 혈액 속 산소를 운반하는 단백질)이 철(Fe) 이온을 포함하고 있어서 산소와 결합하면 선명한 빨간색을 띤다고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피 = 빨간색”을 거의 공식처럼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공식은 척추동물, 즉 우리처럼 등뼈 있는 생명체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지구상에는 빨간 피가 아닌 생명체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 초록 피를 가진 도마뱀이 있고, 투명에 가까운 혈액을 가진 남극 빙어도 있다.
그리고 문어, 낙지, 오징어 같은 두족류(머리에서 다리가 뻗어나온 연체동물 그룹)는 파란색 혈액을 갖고 있다. 색이 다르다는 것 자체가 “뭔가 다른 방식으로 산소를 운반한다”는 의미다.
철 대신 구리를 선택한 생명체
문어 피가 파란 이유는 산소 운반 단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어는 헤모글로빈 대신 헤모시아닌(구리 이온을 이용해 산소를 운반하는 단백질)을 사용한다. 헤모글로빈이 철을 중심 금속으로 쓴다면, 헤모시아닌은 구리(Cu)를 쓴다.
구리가 산소와 결합하면 파란색이 된다.
이건 동전이나 청동 조각상이 오래되면 초록빛 녹이 스는 것과 같은 원리다. 구리가 산화하면 색이 변한다. 우리나라에서 예를 들자면 국회의사당 지붕색상이 푸른색인 이유가 구리가 산화하면서 색이 변한 것이다.
산소를 싣고 있는 헤모시아닌은 파랗고, 산소를 내려놓은 헤모시아닌은 거의 무색에 가깝다. 그래서 문어의 동맥혈은 파랗고, 정맥혈은 무색에 가까운 투명한 색을 띤다.
그렇다면 문어는 왜 헤모시아닌으로 산소를 운반할까? 헤모시아닌은 낮은 수온과 낮은 산소 농도에서 헤모글로빈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심해나 차가운 바다는 용존산소(물에 녹아 있는 산소)가 적고, 수온이 낮다.

이런 환경에서 헤모글로빈은 산소와의 결합력이 오히려 너무 강해져서 조직에 산소를 잘 ‘내려놓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반면 헤모시아닌은 낮은 온도에서도 산소 결합과 방출을 유연하게 조절한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헤모시아닌 분자가 헤모글로빈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헤모글로빈 분자량이 약 64,000 달톤(Da)인 데 반해, 문어의 헤모시아닌은 최대 3,500,000 달톤에 달한다. 거의 50배 이상 크다. 그 거대한 분자가 혈액 속을 유유히 돌아다니며 산소를 나르고 있는 거다.
분자량이 50배나 크다는 게 어느 정도냐면, 우리 혈액 속 헤모글로빈이 ‘승용차’라면 문어의 헤모시아닌은 ‘거대한 덤프트럭’이나 ‘이층버스’ 레벨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 몸은 작은 승용차 수억 대가 바쁘게 도로를 달리며 산소를 나르는 구조라면, 문어는 덩치가 커다란 대형 버스 몇 대가 한 번에 엄청난 양의 산소를 싣고 묵직하게 움직이는 셈이다. 심해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굳이 이 거대한 분자를 유지하는 이유 역시, 추운 곳에서 산소를 잃어버리지 않고 꽉 쥐고 가기 위한 문어만의 ‘대형 생존 버스’인 것이다.
파란 피는 문어만이 아니다

이 원리를 알고 나면 자연계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 게, 새우, 랍스터 같은 갑각류도 헤모시아닌을 사용한다. 살아있는 랍스터가 파르스름하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 투구게는 전 세계 의학계에서 매우 중요하게 쓰인다. 투구게의 파란 혈액에는 LAL(Limulus Amebocyte Lysate, 세균 독소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물질)이 들어있어서, 주사제나 의료기기의 세균 오염 여부를 검사하는 데 사용된다. 사실상 우리가 맞는 백신이나 링거의 안전성 검증에 투구게 피가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 반대로, 남극 빙어는 헤모글로빈도 헤모시아닌도 없다. 혈액이 거의 투명하다. 대신 심장이 크고 혈액 순환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산소를 그냥 혈장에 직접 녹여 운반한다. 남극의 극저온 덕분에 물에 산소가 잘 녹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다.
결국 문어 피가 파란 이유는 어떤 금속 이온으로 산소를 운반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철이면 빨강, 구리면 파랑, 바나듐(일부 멍게류)이면 녹색에 가까운 색이 된다. 지구 생명체들은 각자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완전히 다른 ‘혈액 화학’을 진화시켜 왔고, 그 결과가 이렇게 다양한 피의 색깔로 나타난 것이다.
🐙 문어 피가 파란 이유 QnA

Q1. 그럼 우리가 먹는 문어숙회는 왜 빨간색?
문어 피가 파란색이라면 문어 요리도 파란빛일까?
하지만 우리가 식당에서 보는 문어숙회는 겉이 붉은색이다.
이건 피 색깔 때문이 아니라 문어 피부에 있는 ‘색소포‘ 때문이다. 문어는 주변 환경에 맞춰 보호색을 띠는 능력이 탁월한데, 이때 쓰이는 색소 세포들이 열을 받으면 붉은색 단백질로 변성되면서 겉표면이 빨갛게 변하는 것이다. 진짜 피는 요리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빠져나가기 때문에 우리가 파란 피를 보기는 어렵다.
Q2. 문어는 피가 파래서 똑똑한 걸까?
문어가 도구를 사용하고 미로를 탈출할 정도로 영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쉽게도(?) 파란 피(헤모시아닌) 덕분은 아니다.
오히려 산소 운반 효율만 놓고 보면 우리 인간의 빨간 피(헤모글로빈)가 훨씬 뛰어날 때가 많다. 문어가 똑똑한 진짜 이유는 무척추동물 중에서 예외적일 정도로 뇌가 발달했고, 온몸(특히 다리)에 수억 개의 신경세포가 퍼져 있기 때문이다.
파란 피는 똑똑함의 원천이라기보다는, 그 뛰어난 뇌를 차가운 바다 속에서 정상 작동시키기 위한 ‘냉각수 겸 에너지 보급선’이라고 보는 게 맞다.